조금 늦게 시작한 그림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1. 나를 보는 나의 시선
열 살 때, 한 달 정도 다녔던 데생 수업에서 선생님이 너는 그림에 재능이 없다고 했다.
너무나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학원이었기에 엄청난 실망감과 함께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았다.
나는 그림을 못그려.
그런데도 미술과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으면서도 오랫동안 그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다 결국 그리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40이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그린 선들은 형편없었다. 열 살 때 들었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말 자체나 겉으로 드러나는 스킬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이고 그림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는 걸.
물론 다른 사람의 평가도 중요하다. 때로는 앞으로 나아갈 계기가 되기도 하고,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돌아보게 해주기도 한다. 내가 만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알게 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내가 내 작업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내가 만든 그림에 스스로 만족하는가.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가. 나에게 의미가 있었는가.
“나는 내 그림을 얼마나 응원하고 좋아하고 있을까.”
남이 좋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내가 만족하고 괜찮다고 느끼는 그림이어야 완성된 것 처럼 느껴진다는 걸.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이 내 그림을 어떻게 평가할지 걱정하기보다, 이제는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먼저 던지게 되었다.
2. 나의 일상은 정말 평범할까?
그림을 자주 그리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모든 것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거 같다.
사물의 형태와 색, 표면에 반사되는 빛,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까지.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어떻게 그리면 좋을까, 저 색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잡초며 길가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코를 밖고 살았던 30대가 너무나 아깝고 부끄러워질정도로.
계절마다 저마다의 공기와 색이 있고, 그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있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수없이 지나쳤던 길에서도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한다.
그림을 그릴수록 더 많은 것이 보였고, 더 많은 것을 발견할수록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매일 시계처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아도, 모든것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고, 똑같은건 생각보다 많이 없다는걸 그림을 그리면서 깨닿게 되었다.
어쩌면 일상의 지루함과 내가 느껴오던 평범함은,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것도.
3. 서투름이 허락한 자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원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다 보니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거나 디지털 브러시를 시험해 보는 일이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잘할 수 있을지부터 고민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먼저 앞선다. 어느새 손을 뻗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면 일단 해보고 싶어진다.
물론 시작부터 잘되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 사용하는 재료는 손에 익지 않고, 선은 흔들리고, 결과물은 생각했던 모습과 한참 다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그것이 그저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진것 같다.
그림에는 내가 마음속으로 ‘차마 눈뜨고 보기싫은 중간 단계’라고 부르는 시간이 있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중간이기도 하고, 새로운 재료나 대상을 익혀가는 과정의 한가운데이기도 하다.
그 시기에는 무엇을 해도 어설프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막상 끝까지 그려보면, 중간에 걱정했던 것만큼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설령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음에는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다.
엉망으로 그리는 동안에도 한두 가지 새로운걸 배운다. 재료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일 수도 있고, 우연히 발견한 작은 요령일 수도 있다. 그렇게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와 실제로 구현해낸 결과물의 간극을 좁혀간다.
시도는 그 간극을 조금씩 좁혀주며 그 결실이 내게 다시 돌아오는거다. 이렇게 반복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서툰 시작도, 실패한 결과도 그다지 두렵지 않게 되었다.
무언가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것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받아들이는 새로운 나의 모습이 있다.
AI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다.
굳이 시간을 들여 그림을 배우고 직접 그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의 두 번째 뇌인 손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면서, 나는 조금더 내면에 집중하며 깊이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고 나를 옭아매던 것들로 부터 훨씬 자유로워졌다.
그렇기에 그림을 그리는걸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